산정무한[정비석지음] Name : 오영수 (ohys42)
산정무한 [山情無限][1] 정비석
                                                국어책에 안 나온 부분
  산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히만 차리고 떠난다는 옷치장이, 정작 푸른 하늘 아래서 떨치고 나서니 멋은 제대로 들었다. 스타킹과 니커팬츠와 점퍼로 몸을 거뿐히 단속한 후, 등산모 젖겨 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고개를 드니, 장차 우리의 발 밑에 밟혀야 할 일만 이천 봉이 천리로 트인 창공(蒼空)에 뚜렷이 솟아 보이는 듯하다. 그립던 금강으로, 그리운 금강산으로! 떨치고 나선 산장에서는 어느새 산의 향기가 서리서리 풍긴다. 산뜻한 마음으로 활개쳐 가며 산으로 떠나는 지완과 나는 이미 진고개에 방황하던 창백한 인텔리가 아니라,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1]의 기개(氣槪)를 가진 갈데없는 야인(野人) 문서방(文書房) 이요, 정(鄭)생원(生員) 이었다.
[1] 힘이 산이라도 빼어 던질 만 하고, 기(氣)는 세상을 덮을 만큼 웅대함
 차 안에서 무슨 흘게 빠진 체모란 말이냐?  우리조상들의 본을 떠서 우리도 할 소리 못할 소리 남 꺼릴 것 없이 성량(聲量)껏 떠들었으면 그만이 아닌가? 스스로 야인의 긍지에 도취되어서, 뒤로 흘러가는 창밖의 경개(景槪)를 우리는 호화로운 심정으로 영접하였다. 고리타분한 생활을 항간에 남겨두고, 잠시나마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처럼 쾌사(快事)였던가? 인간 생활이 코답지근하고 답답하기 한없음을 이제서 깨달은 듯하였다. 잠시나마 악착스러운 생활을 벗어나 순수한 자연의 품 안에 들어 본다는 것은, 항상 오만한 인간 생활의 순화를 위하여 얼마나 긴요한 일일까? 허심탄회 인화지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전개될 자연들을 우리는 해면(海綿)처럼 흡수했으면 그만 이었다. 철원서 금강 전철로 차를 바꿔 탄 것이 저무는 일곱시쯤--먼 시골에는 황혼이 어리고, 대지는 각일각 회색으로 용해되어 가는데, 개성을 추상(抽象)당한 산령들이 묵직한 윤곽만으로 서녘 하늘에 웅크렸다. 고요하기 태고 같은 이 풍경 속에서 순시도 멎음없이 변화를 조종하는 기막힌 조화는 대체 누가 부리는 요술이던가? 창명(愴冥)히 저무는 경개에 심취하여 창가에 기대인 채 마음의 평화를 즐기다가, 우리는 어느덧 저 모르게 가슴 깊이 지녔던 비밀들을 아낌없이 털어놓도록 그만큼 우리를 에워싼 분위기는 순수했던 것이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지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의 청춘사(靑春史)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웠을 사랑담을 허심히 들어 넘기며, 나는 몇 번이고 담배를 바꿔 피웠다. 침착한 여인네가 장롱에 옷가지 챙겨 넣듯 차근차근 조리있게 얽어 나가는 지완의 능숙한 화술은, 맑은 그의 음성과 어울려서 귓가에 도란도란 향기로웠다. 사랑이 그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 세상에 사랑처럼 쓰라린 것, 매운 것은 없다는데, 지완의 것은 아침 이슬같이 담결(淡潔)했다니, 그도 그의 성격의 소치일까? 창 밖에 금풍(金風)[1]이 소슬해서,그 사람이 유난히 고매하게 느껴졌다. 내금강역에 닿으니, 밤 열시! 어느 사찰을 연상시키는 순 한국식 거하(巨廈)가 달빛 속에 우리를 반기는 듯 맞는다.  [1] 가을 바람                                                
                             ⇒내금강 역사 [驛舍]에 도착[국어책에나온것]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떠다[1] 놓은 듯이 멋진 양관[洋館][2] 외금강 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 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정다운 호대조[好對照][3]의 두 건물이다. 내 [內][4] 와 외[外][5] 를 여실히[6]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1] 옮겨다 [2] 서양의 산장을 본뜬 이국적인 건물 [3] 좋은 대조를 이루는 [4] 내금강 역사-한국식[우리나라 상징] [5]외금강 역사-서양식[외국 상징] [6] 실제와 같게

                                                     ⇒내금강 역사[驛舍]의 외관
십삼야월[十三夜月][1]의 달빛 차갑게 넘실거리는[2]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深山]의 밤이라 과시[果是][3]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溪澗][4]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長安寺]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우쭐우쭐 둘러선다.[5] 기쓰고 찾아온 바로 저 산이 아니었던가고 금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6]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마시니, 어느덧 간장[肝臟]도 청수[淸水]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7] 청계[8]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기 십 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丹靑]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기조차 외람된 문선교[問仙橋][9]!
[1] 십삼일의 밤에 뜬달 - 보름에 가까운 밝은  [2] 쌀쌀한 가을밤의 분위기표현 - 시각의 촉각화[공감각적인 표현]  [3] 과연, 정말로  [4]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청각의 촉각화]  [5] 의인법을 통한 역동적인 표현  [6] 빨리 보고싶은 마음 - 여행에 대한 설레임과 기대감   [7] 산의 정기로 온 몸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든다.[자연에 동화되는 마음을 구체적 비유를   통해 표현]/ 간장 : [준말] 간 [8] 맑은 계곡  [9] 선경이 어디냐고 묻는다는 뜻을 가진 다리
                                                         ⇒ 문선교 앞에 당도함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隱士][1]가 예까지 찾아와서 선경[仙境][2]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차문[借問][3]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 조차[4]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俗界][5]가 스스로 유별[有別][6]한 탓이었던가?
 차문주가하처재[ 借問酒家何處在][7]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8]
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世塵][9]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1]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사는 학덕이 높은 선비  [2] 신선이 산다는 곳. 仙界, 仙鄕  즉 속세를 떠난 깨끗한 곳 [3] 남에게 모르는 것을 물음  [4] 전혀  [5] 현실세계  [6] 구별되는 [7] 술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니  [8] 목동이 손을들어 살구꽃이 핀 마을    을 가리킨다. {당나라시인 두목[杜牧]의 詩 : 청명[淸明]의 한 부분} 행화촌: 술집의 뜻임   [9] 세상사의 속된 일들
                                                   
                                                     
                                                     ⇒ 문선교에서의 감회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1]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에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峰][2]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3]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峰][4]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5]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1] 고단한 것에 비해서는  [2] 신령스러운 봉우리 [3] 금강산을 눈앞에 둔 설렘과 기대감    [4] 높고 험한 봉우리 [5] 과장법, 직유법
                                      ⇒ 탐승 전에 바라본 산의 모습[원경]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1]들이었다. 청운[靑雲[2]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1] 아무런 장애 없이 곧게 자란 [의인법]  [2] 푸른빛을 띤 구름 높은 명예나 벼슬을 비유   하여 이르는 말 立身出世를 뜻하는 말
                                        ⇒ 귀공자다운 나무들의 기품[근경]
조반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1]의 길에 올랐응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 산악이 열병식[2]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1] 앞길이 험한 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2] 정렬한 군대의 앞을 지나면서 검열하는 의식
                                           ⇒원근 산악의 단풍[丹楓]
만학천봉[萬壑千峰][1]이 한바탕 흐드러지게[2]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을 대로 볽었다. 자세히 보니, 홍[紅]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橙][3]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4]의 조화던가!
[1] 첩첩이 겹쳐진 수많은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 [2] 썩 탐스럽다. 매우 흐뭇하거나 푸지다. [3] 등자[橙子]의 준말 등자나무의 준말 [4] spectrum : 빛을 프리즘등 分光器로 분해했을 때 생기는 무지개와 같은 빛깔의 띠. 波長의 차례로 늘어 놓임. 즉 복잡한 조직을 가진 대상을 단순한 성분으로 나누어, 질량 등의 차례로 늘어 놓은것
                                           ⇒다양한 산의 빛깔
복잡한 것은 빛깔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1]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峭][2]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3]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風趣]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4]이 아니다.
[1] 종류나 갈래가 많다 [2] 山 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다 [3] [마음씨나 태도가] 부드럽고  무던하다 [4] 평범하고 속됨
           산정무한 [山情無限][2] 정비석
                                                                                                                          ⇒산의 용모, 풍취
산의 품평회[1]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2] 우거진 것은 모두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3]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4]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5]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6]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7]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1] 물건이나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하는 모임 [2] [주로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매우 무성하고 푸르다[창창울울하다] [3] 두변의 길이가 같은 삼각형, 등각 삼각형 [4] 차례 때, 탑처럼 높이 괴어 올린 祭物  [5] 예불할 때 올리는 음식상  [6] 차례탑 같은 잣나무  [7] 千不當萬不當[천번만번부당하다는 뜻으로] 아주 부당함을 이르는 말. 만만부당 /  만부당천부당 / 천만부당
                                         ⇒장안사 주변풍경에 대한 예찬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1]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2]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3]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4]하여 천지에 참괴[慙愧][5]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명경지수[明鏡止水][6]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외연(巍然[7])히 솟은 층암절벽(層巖絶壁)[8]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9]그대로였다. 옛날의 죄의 유무를 이 명경(明鏡)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10]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1]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  [2] 좁고 험한 골짜기 [3] stamp book: 명승고적이나 특별한 행사를 기념하는 고무도장을 찍기 위한 책자 [4] 아래를 내려다봄과 위를 쳐다 봄 [5] 부끄럽게 여김 [6]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으로 맑고 고요한 심경(心境)을 이르는 말  [7] 높고 우뚝하게 [8] 높고 험한 바위가 겹겹이 쌓인 낭떠러지 [9] 화장할 때 쓰는 큰 거울 [10] 그림자
                                                   
                                                ⇒화장경 그대로인 명경대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1]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臆說)[2] 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3])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4]할 일인가?
[1] 거울이 발명되어 자기 자신의 못난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간은 비극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못남을 극복하려는 데서 문화가 싹텄다.  [2] 근거없이 제멋대로 추측하거나 억지를 부려 하는 말 [3] 오히려 부족함  [4] 가히 놀랄만하다
                                                 ⇒명경대에서의 감상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麻依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에 영조(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1]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1] 속됨을 벗어난 고상한 기품, 곧 왕족의 기품
                                      ⇒명경대에 얽힌 마의 태자의 전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1]처럼 막아 서는 웅자(雄姿[2]가 석가봉(釋迦峯),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3]이 천진봉(天眞峰)!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4]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
[1] 염라대왕  [2]늠름하고 씩씩한 모습 [3] 신과 같은 거룩한 모습  [4] 매우 좁은
                                            ⇒ 황천계곡에 이르는 여정
몸이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1],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가
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2]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3]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4].
[1] 구불 구불한 길이 계속 이어지다 [2] 그윽하고 깊숙하다 [3] 반복법 열거법
[4] 은유법 과장법
                                           ⇒황천계속의 수목과 단풍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1]이요, 벽공에 외연히[2] 솟은 봉봉(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떨기의 꽃송이다.[3] 산은 때 아닌 때[4]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百花爛漫)[5]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있는 것일까? 진주홍(眞朱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綿)[6]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1] 불이 번진 들판: 단풍의 비유 [2] 우뚝 [3] 단풍으로 뒤덮인 봉우리 [4] 봄이 아닌 가을[5] 온갖 꽃이 피어서 아름답게 흐드러짐 [6] 동물의 뼈가 솜같이 된것
⇒단풍의 아름다움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1]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1] 물아일체(物我一體) : 자연물과 자아(自我)가 하나가 된 상태 대상물에 완전히 몰입(沒入)된 경지. 물심일여(物心一如)
⇒단풍에 동화된 경지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1]와 목잔(木棧)[2] 과 철삭(鐵索)[3]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 ── 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4]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오천 척의 망군대(望軍臺) ── 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5]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峰)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6]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峰)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 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7]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8])하는 군웅(群雄[9])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仞斷崖[10]), 무한제(無限際)[11]로 뚝 떨어진 황천 계곡에 단풍이 선혈(鮮血)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단장[七寶丹粧)[12]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은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1] 돌계단 [2] 나무로 사닥다리처럼 놓은 길. 나무로 만든 잔도(棧道) [3] 여러 가닥의 철사를 꼬아 만든 줄, 쇠 동아줄 [4] 아득히 멀고 넓억서 끝이 없음 [5]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정기를 느낌 [6] 손짓으로 부를 만한 가까운 거리(距離) [7]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 어중이 떠중이 [8] 국토를 나누어 차지하여 세력권을 이룩함 [9] [같은 시대에 태어난] 많은 영웅(英雄) [10] 천길이나 될 듯한 높은 낭떠러지 [11] 끝이 없이 [12] 여러 가지 패물로 몸을 꾸밈
망군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전경과 감상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訶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1]같이 고왔다.
[1] 청순한 여인의 이미지
마하연 여사 주인의 환대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암(摩訶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 직하다. 이런 심산에 웬 승려가 그렇게도 많을까 !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靑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1]
옛글 그대로다.
[1] 당나라의 승려 영일의 한시 “승원”의 한 부분
⇒마하연사의 승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1]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2]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송이같이 떠돌았다.
[1] 옛것을 살피고 생각하는 마음  [2] 청각의 촉각화[감각적 표현]
⇒남포동을 보며 추억을 떠올림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린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1]
[1]무질서한 자연의 소리를 조화로운 음악으로 느낌

                산정무한 [山情無限][3] 정비석
⇒마하연여사의 밤 정취
달빛에 젖으며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가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는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笞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1])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 가는 카투사의 뒤를 네플류도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1] 신명(神明)에게 고하며 빎
⇒깊은 밤 여관집 아가씨가 책을 읽고 있는 내용을 상상함
다음 날 아침, 다시 산을 찾아 나섰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스님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峰)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진 광풍(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 가며 짜 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1]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1] 갑절이나 더 낫다
⇒비로봉에 오르는 길의 날씨 변화와 운무속의 경치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峯)을 영송(迎送)[1]하는 것도 가히 장관이었다.
[1]가는 이를 전송하고, 오는이를 맞이함. 보였다 안 보였다하는
⇒악천후 속의 영봉의 장관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1]로 내리붓는다. 만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人情)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로(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2]이지, 이렇게 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 고, 간담(肝膽)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1] 비가 갑자기 몹시 쏟아짐  [2] 분수에 맞지 않음. 여기서는 날씨의 변화가 극치에 이른 것을 표현.
⇒변덕스러운 날씨와 비로봉정상 찻집의 인정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岩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외·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1])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可惜)[2]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海拔) 육천 척에 다시 신장(身長) 오 척을 가하고 오연(傲然)[3]히 저립(佇立)[4]해서, 만학천봉(萬壑千峯[5])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개선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1]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아래 [2] 애틋하게 아깝다. 안타깝다  [3] 오만스럽다. 거만한듯하다 [4] 우두커니 섬  [5] 첩첩이 겹쳐진 수많은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
⇒비로봉 정상에서의 감상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1]가 아니면 살지 않는자작나무는 무슨 수중(樹中)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2] ──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우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1] 깊은 대궐.  깊은 산속 [2] 마의태자의 말이 변하여 된 것이라는  전설의 바위
⇒마의 태자 무덤에서 느껴지는 처량함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1] 용마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白樺)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中天)에 서럽다.
[1] 즐겨 탔던
⇒마의태자 무덤에서 느껴지는 서러움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裏)[1]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2]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1] 마음에 두고 있는 생각  [2] 세상의 모든 백성
⇒마의 태자에 대한 회고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依支)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暗然)[1]히 수수(愁愁)[2]롭다.
[1] 분명하지 않음. 슬픔으로 침울함  [2] 근심스럽다.  마음이 서글프고 산란하다

2006-04-07 오후 7: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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